
움직이고 이끌리고 뒤섞이며 되어가기
: 전시 <0과 F사이 그라데이션>
'사이'를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들에 맞닥뜨리기: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고, 어떤 가능성을 보고 있을까?“
자신의 정체성과 꿈을 찾아 나서야 하는 청소년 시기, 아이들은 다양함과 깊이 속에서 여러 가능성을 발견하기보다, 점차 동일화되고 획일화된 것을 보편으로 여기는 ‘정상성’ 속에서 결핍이나 범주 바깥의 것들을 극도로 꺼려하는 방식의 태도를 내면화 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도한 경쟁 문화를 일찍부터 경험하는 아이들은 정해진 틀대로 가지 않는 것, 계획에서 어긋나는 것들에 대한 극심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확실하고 안정적인 것, 명확한 것, 확정적인 것들을 강요당하는 듯한 그들의 일상에, 이번 전시 <0과 F사이 그라데이션>은 빽빽한 긴장을 다소 늦추는 느슨한 호흡으로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사이’를 거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도록 초청한다. 서로 다른 가치와 존재의 공존을 머리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마주치고 만져보고 궁리하고 거닐어보고 변형시키고 만들어가는 동안 아이들은 어떤 질문들에 맞닥뜨리며 어떤 흔적들을 몸에 새겨가게 될까?
사물과 함께 추는 왈츠: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전시장에 처음 들어선 관람객은 공중에서 유영하듯 춤을 추는 투명한 풍선들(에어 플로터, air floater)과 마주친다. 뭉쳐졌다 흩어지고 떠올랐다 가라앉는 찬찬한 풍선들의 춤사위는 공간에 리듬을 부여한다. 그 리듬은 관람객들이 개별 풍선에 매다는 오브제와 풍선 내 공기 무게 사이의 긴장 속에서 시작된다. 너무 많은 무게를 달면 풍선은 바닥에 주저앉고, 지나치게 가벼울 시 그것은 천정에 가로막힌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풍선이 부유할 수 있는 적절한 무게를 찾기 위해 관객들은 클립, 고리, 집게, 디스크, 나무조각, 철사, 무게 추 등 사물로 구성된 작은 오브제들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접합과 분리를 반복한다. 무게의 그라데이션 속에서 그 ‘적정선’이 발견된 순간, 풍선은 춤을 추며 제 길을 찾아 나선다. 흔들리며 떠나가는 몸짓의 자유로움이란 비단 풍선의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관람객의 손을 떠난 풍선들은 전시장 내 공기의 움직임, 관람객들의 걸음이 만들어내는 자그마한 바람, 음악 등과 공명하며 유영한다. 움직이며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오브제를 싣고있는 풍선만이 아니다. 전시장 내 조명에 의해 생성되는 여러 겹의 풍선 이미지(그림자)들은 한쪽 벽면에 넓게 드리워진 영상 속 드로잉에 또 한층의 레이어를 부여하며 공간의 변주를 지속시켜 간다. 관람객은 풍선의 떠나감을 지켜보다, 어느덧 풍선의 움직임에 이끌리고 유인당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몸짓과 리듬을 만들어간다. 풍선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며, 제 길을 가는 사물들에 조심성있게 반응하며, 멈춰있는 듯 각자의 속도로 느슨히 부유하는 그 사물들이 건네는 춤에 몸을 맞춘다.
풍선에 매달려 사물들이 각자의 길을 떠나가는 모습, 함께 춤을 추고 몸을 맞추다가 헤어지는 모습, 섞여드는 풍선의 몸, 사물의 몸, 관람객들의 몸.


서로의 움직임에 반응하고 신경쓰며 세심히 전시장을 거니는 것 속에서 우리는 가벼움도 무거움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무게를 느끼는 것일까? 무릎을 굽히며 다음 스텝으로 갈 때 두둥실 떠오르는 왈츠를 추며 장내를 빙글빙글 도는 풍선들은 저마다의 무게를 갖고 사물들을 실어나르며 복수적인 길을 열어낸다. 사물과 함께 추는 춤 속에서 관람객이 경험하는 것은 내가 주도하는 몸이 아니라 이끌리는 몸, 머뭇거리고 멈칫거리는 몸, 물러났다가 다가가기를 반복하는 몸, 배려하는 몸일지도 모른다.
있었다 없어지는 것들 사이의 조잘거림: 열림과 닫힘 사이에서
앞의 세션에서는 개방된 공간의 리듬에 맞춰 사물과 접촉하는 몸을 경험했다면, 두 번째 세션에서 관람객들은 구조화되고 기획되어 있는듯 보이는 구조물 틈새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험하며 길을 열고 닫는 기회를 제공받는다. 구조물 사이사이에 있는 구멍들을 찾아 핸드폰을 갖다 대면 열리는 확장된 (증강현실의) 세계에서 발견하는 이야기, 미로와 같은 블록 숲을 빠져나가고자 하는 과정에서 새어나오는 어떤 목소리를 따라 열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타자와 마주친다. 응축된 공간 안에서 관람객은 걱정어린 목소리, 생경하지만 친근한 목소리, 비밀스럽고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에게는 일견 미로같기도, 도시 건물들 같기도, 성곽 같기도 한 플라스틱 구조물(밀크박스)들은 보는 관점에 따라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의 구분을 보다 명확히 하는 경계선 혹은 벽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박스를 이루는 무수한 틈새를 스치며 탐험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 벽 바깥을 궁금해 하고, 그 너머를 보도록 하는 시선으로 나아간다. 모험하듯 ‘사이’를 거닐며 틈틈이 숨어있는 새로운 구멍을 발견하고, 새어나오는 이야기들(역사, 소설, 동화 등 인물과 자연물의 음성 및 AR 영상 메시지)에 주목하면서, 박스 위로, 박스 아래로, 박스 사이로, 박스 너머로 우리의 몸과 시야를 조정하면서 말이다.
박스를 옮기며 길을 열 자유, 방어막을 칠 자유, 막다른 곳에 몸을 은닉할 자유, 사이사이를 살피며 타자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귀 기울일 자유, 확장된 세계로 빠져들며 의미를 부여할 자유, 공간을 분유하는 타자의 존재를 의식하고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함께할 자유.


시각, 청각, 촉각이 교차하는 자극 속에서 아이들은 각양 각색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몸을 구부리고 펼치며 타자와 접촉하고, 다양한 공존의 방식들을 감지해 간다. 이러한 몸의 흔적들을 입은 채로 전시장 밖을 나서는 이들은 그곳을 들어서기 이전의 자신과 결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관람객들이 이 전시를 통해 경험하는 작품과의 ‘상호작용’이란, 각자의 자리에서 경계를 유지하며 주고받는 (인터렉티브 아트와 같은 형식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과는 질적으로 다르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공간과 사물에 접촉하며 바뀌는 몸, 그리고 그 변형된 몸이 또다시 다른 공간과 의미를 만들어내며 나아가는 것. 이것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속에서 서로에게 마음쓰고 헤아리며 서로의 삶을 공유해가는, 각자의 역사 및 시간의 흐름에 합류하며 함께 나아가는 **“조응(correspondence)”의 작용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 곳곳에 숨어있는 존재들을 만나기 이전의 자신과, 그 존재를 접촉한 후의 ‘다른’ 자신을 만나며, 이윽고 관람객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고 되묻게 될지도 모른다. 순수한 호기심이 열어내는 그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타자와의 접촉, 그리고 헤어짐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말이다.
움직이고 이끌리고 뒤섞이며 되어가기: 몸을 열어내는 경험으로서의 예술
전시 <0과 F 사이의 그라데이션>은 가벼움과 무거움, 열림과 닫힘으로 대표되는 0과 F(화이트와 블랙으로 바꿔말할 수 있는 양분화된 경계) 사이사이를 거닐며 조잘거림들, 기척들,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들, 없었다가 생겨나는 것들을 감지하고 그 모호함의 순간들에 머물러 보기를 제안하고 있다.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관조하는 방식으로 예술을 만나기보다는, 펼쳐지고 움직이는 동사적 상황 안으로 들어가서 끊임없이 우리의 몸을 동원하며 사물을 쫓아가고, 그에 이끌리고, 사물 자체가 되어가는 방식으로 몸을 쓰며 행위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전시가 제공하는 예술적 경험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에 이끌리는 몸, 사물과 공명하는 몸, 사물 안으로 들어가는 몸, 그로인해 남겨진 몸의 흔적들을 통해 사물 자체가 되어가보고 낯선 것으로서의 타자와 뒤섞이며 유영하는 것. 이는 우리 자신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거나 기존에 내가 지닌 시선으로 세계를 의미화하고 구성하는 것을 넘어, 타자가 되어보는 ‘몸의 경험’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언어와 의미의 층위 이전에 보다 직관적이고 근원적인 방식으로 관람객에게 ‘접촉’을 권유하는 것, 불확정적이고 애매모호한 상황에 우리를 노출시키고, 그 언저리에 머무르게 하고, 그 안에서 거닐어 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이라는 형식’이 건낼 수 있는 뜻밖의 선물이 아닐까.
*구소정. “성인 된 ‘대치 키즈’, “지금까지도 정신과 치료”…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 이대로 괜찮을까.” 헬스조선, 2025년 4월 16일.
https://m.health.chosun.com/svc/news_view.html?contid=2025041602184
**팀 잉골드(Tim Ingold),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김병화 옮김 (서울: 현대미학사, 2017)
글 : 서정은
-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교육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
- 서울대, 경인교대, 가천대 등 강사(2024-현재)
- 한국조형교육학회 국제교류위원, 한국교육철학학회 학술위원(2025-현재)
- 『우리는 예술가입니다』(공저, 2024), 『다르게 보는 눈, 예술가되어』(공저, 2020)